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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O O K

[에세이] 오래오래 좋아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내일이나 내일 모레부터 출근하실 수 있으세요? 

아침 일찍 카톡이 왔다. 하루라도 더 시간을 벌고 싶어 모레부터 출근하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사자같은 머리라도 수습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미용실을 예약했다. 화이트 톤의 환한 미용실 의자에 앉으니 누렇게 뜨고 퉁퉁 부어버린 얼굴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미용실에서 곤욕스러운 것 중에 하나는 이렇게 큰 거울로 내 얼굴을 쳐다봐야 하는 것이다. 나는 서둘러 갖고 온 이 책을 펼쳤다. 미용실에 갈 때 마다 책을 한권씩 갖고 가곤 하는데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이번에는 성공이다.책장을 넘길 때 마다 나는 내 마음 같은 문장에 격하게 공감하며 한 귀퉁이를 작게 접었다. 

3번째 입사다. 3번이나 같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계약 기간을 온전히 채운 적도 있고, 중간에 나온 적도 있다. 그래도 이 곳에서 나를 다시 불러주고 일할 기회를 준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다만 매번 이 곳을 나올 때는 다시는 이 곳에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는데 늘 돌아가게 되니 그게 씁쓸할 뿐이다. 더이상 일에서 보람이나 성취감을 찾지 않는다. 존재감을 드러낼 마음도 없다. 그저 돈버는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더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글도 써야 한다. 안그러면 이 회사에 나라는 인간은 순식간에 잠식 당하고 만다. 하루가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 나는 이력서를 준비하면서 알았다. 내가 이 직장에 첫 발을 딛은 것이 2016년이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이 자리다. 그렇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짐하게 된 것이 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뭐든 오래 하자. 무리하면 질리니까. 

머리는 실패했다. 6월 이벤트 가격이 적용되는 건 매직이라고 해서 선택했는데 역시 머리통에 딱 붙은 머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사자같던 머리는 내 큰 얼굴을 요리 조리 잘 감춰줬던 모양이다. 여실히 드러나는 큰 얼굴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머리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평생 이렇게 긴 머리는 처음이다. 어쩌다 이렇게 머리가 길어졌을까? 언젠가 짧은 머리의 나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다. 그때의 쾌감을 위해 아직은 긴 머리를 남겨 두기로 한다. 


수천 번도 넘게 해 온 일을 하면서 어떻게 기계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매일 똑같으면서 어떻게 매일 새로울 수 있을까.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어떻게 지금 해야 할 일에 몰입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를 만들까.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예술을 하면서도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이 있고,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일하면서도 예술가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지금부터라도 알아보아야겠다. (35p)


나는 늘 더 뛸 수 있을 것 같을 때, 한 바퀴 정도 더 뛰어도 될 것 같을 때 멈춘다. 어떤 이는 더 뛸 수 없을 것 같을 때 한 바퀴를 더 뛰어야 능력이 향상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최고의 마라토너가 되려는 것이 아니니까. 그저 오래오래, 혼자서, 조금씩 달리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니까. (중략) 20대에는 별일이라곤 없는 내 인생이 망작 같기만 했는데, 중년이 되어버리고 나니 별일 없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별일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 살얼음판 위를 걷듯 조심조심 살고 있다. 오늘도 별일 없고 내일도 별일 없기를. 오늘도 달릴 수 있고 내일도 달릴 수 있기를. (53p)


우리는 그 남자를 함께 응원한다. 우리가 그런 일에 있어서는 한 팀이라는 것에 안심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일, 몇 년 동안 걷는 연습을 하는 한 젊은 남자를 응원하는 일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113p)


삶은 피멍이 들도록 부딪쳐오는 수많은 장애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걸 이제는 안다. 돈으로, 가짜 행복으로, 일시적인 위안물들로 가리려고 해도 가려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장애물에 부딪혔을 때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해줄 무언가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정신 차리고 살라며 뺨을 때리고, 또 어떤 이들은 다 괜찮다며 어깨를 토닥여 준다. 그러고 보니 그 많던 멘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그 멘토들도 다 망해버린 건 아닐까. 뭐, 그래도 괜찮지. 망해도 괜찮지. 망해도, 망한 후에도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어 있으니까. (1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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