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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_2018 올 해의 책

다른 해에 비해 올 해 (독서모임의 영향도 있고) 책을 좀 더 읽은 편이다. 한참 책만 읽었던 때와 비교한다면 여전히 참담한 수준이긴 하지만 그 때를 따라갈 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나한테 스토너는 올 해의 책이다. 스토너를 처음 알게 된 건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였다. 그때도 방송을 몇 번이나 찾아서 들을 정도로 좋아했고,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 왔었다. 그런데 엄청난 기대와 호감과 달리 초반 몇 장에서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2주를 들고만 다니다가 도로 반납한 일이 있다. 그러다 스토너를 다시 읽게 된 건 골드 언니의 추천 때문이었다. 스토너를 처음 알게 된 이후로 시간이 한참이 흐른 후에나 나는 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됐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책이나 영화, 드라마들이 그렇듯이 정말 좋았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을 도와 농사 짓는 것 밖에는 몰랐던 스토너가 대학에 와서 문학을 알게 된 순간, 스토너의 삶의 방향은 달라졌다. 농사를 짓는 기술이 필요한 집에서 문학은 그야말로 무쓸모한 것이다. 스토너는 쓸모 없는 아름다움에 매료됐고 아마 처음으로 부모의 말의 순응하지 않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스토너는 문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다. 

그 이후 그는 사교모임에서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 결혼은 실패했다고 깨닫게 만들어주는 아내를 만나게 된다. 문학을 사랑했고 헌신했지만 대학에서도 정치적 싸움에 실패하고 철저히 외면당한다. 실패한 결혼 속에서 딸이 태어나 그나마 스토너에게 위안이 되었지만 자신을 증오하는 아내의 교육 방식 때문에 딸은 스토너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그런 딸의 인생도 비참한 순간들을 맞는다. 인생에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자신의 자리를 떠날 수 없던 스토너는 그 사람마저 잃고 만다. 이 모든 파국의 순간들 속에서 스토너는 도망을 모르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리셋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태도로 아내의 비난을 견디고 불합리한 인사 조치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멀리에서 보면 스토너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인간이다. 행동하지 않는 인간이다. 하지만 차라리 도망치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가 도망치지 않은 것은 그저 무기력하게 삶에 순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본인이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는 전 생애를 묵묵히 한 자리에 있었다. 


"자네는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여기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곧 알 수 있을 걸세. 자네 역시 처음부터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중략) 자네는 항상 세상에게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니까. 목화밭의 바구미, 콩줄기 속의 벌레, 옥수수 속의 좀벌레, 자네는 그런 것들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싸우지도 못해. 너무 약하면서 동시에 너무 강하니까. 이 세상에 자네가 갈 수 있는 자리는 없네." (46p)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159p)

두 사람의 대화는 마음속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바탕으로 몇 번이나 연습한 공연 같았다. 문법적으로 정확한 두 사람의 말 속에 그들이 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완료형에서 시작해서 ("그동안 우린 행복했어요. 그렇죠?") 과거형으로 나아갔다가 ("우린 행복했어요.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것 같아요.") 마침내 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30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