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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_김영하


남편은 공항에서 '여행의 이유'를 발견하고 이 책을 읽어보고 너를 좀 이해해 봐야겠다고 했다. 결혼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가 본 남편은 여행에 목메는 와이프 덕에 꽤 많은 곳을 여행했다. 여행을 가면 좋아하지만 한 번도 먼저 어딘가 가고 싶다는 얘길 한 적 없는 남편은 늘 어딘가 가고 싶어하는 나를 신기해했다. 남편은 진짜 여행하는 내내 이 책을 읽었고, 조금은 나를 이해할 수도 있겠다고 했다. 어? 나도 너한테 설명하지 못한 내 마음을 이 책이 설명해 줬단 말이야? 

나는 여행에서 돌아 온 후, 이 책을 읽었다. 무릎을 치게 만든 문장들을 많이 만났다. 나 스스로도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여행에 대한 집착은 이런 것 때문이었나? 안타깝게도 이런 것이라면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인물의 내면 부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게 되는 항목은 '프로그램'이다. 노아 크루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흑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 같은 고정관념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종차별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백인은 어쩌다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룬 흑인을 만나면 '흑인이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대사를 칭찬이랍시고 치게 된다. (58p)


어떤 인간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과한 뒤, 그 고통이 자신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때 경험하는 안도감이 너무나도 달콤하기 때문인데, 그 달콤함을 얻으려고 고통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안의 프로그램은 어서 이 편안한 집을 떠나 그 고생을 다시 겪으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디로든 떠나게 되고, 그 여정에서 내가 최초로 맛보게 되는 달콤한 순간은 바로 예약된 호텔의 문을 들어설 때이다. (61p)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6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