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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_백수린


그러다가 자기가 원했던 것같이 미모의 아내를 맞이하지도 못하고 어느 날 밤 돌진하는 음주 운전자의 차량에 들이받혀 죽어버린 L을 나도 모르게 떠올렸는데, 나는 L에게 딱히 큰 호감도 없었고, 그의 어떤 태도를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 애썼을지도 모르는 L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자 한없이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그런 식의, 어쩔 도리가 없는 마음이 되어버린 것은 그즈음 내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사람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6p)


그렇지만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 이후의 언젠가, 내가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강이 "그럼 너는 우리 아이를 너처럼 외롭게 만들어도 좋다는 거야?"라고 물었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강이 그 말을 했던 사실을 떠올리면 목구멍이 뜨거워지는데 그것은 그가 나의 가장 내밀한 부분, 그에게만 어렵게 드러냈던 나의 연약한 부분을 너무도 무심한 방식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 일을 기억할 때마다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진실이다. (120p)


할머니, 엄마, 나 3대에 이르는 여자들의 역사는 어느 집에나 있다. 대개 비슷하다. 징하게 싸우고 뜨겁게 미워하고 눈물나게 연민한다. 애증의 관계라는 두 글자로 설명하기에 그 감정의 폭이 너무 크다. 우리 집에도 물론 그 관계가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가장 아픈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서로의 역사를 가까이에서 봤기 때문이다. 엄마는 할머니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나는 그런 할머니와 엄마가 닮았다고 생각한다. 엄마에게 사근사근한 딸이 아니듯 엄마도 할머니에게 친절하게 말하는 법이 없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 반대 방향을 향해 뛰었는데 어느 새 나는 비슷한 풍경 속을 걷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제는 인생의 모습이 모두 비슷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여전히 나도 엄마도 할머니도 서로의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다는 것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