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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판타지 입니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민규 (예담,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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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리뷰를 쓰는 일이 어려워진다. 그건 첫 마디를 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읽으면서 좋다!고 감탄한 책일수록 더 그렇다. 왜 좋은지 설명해봐!라는 것인데, 그게 말이야, 야! 읽어보면 너도 알아! 이렇게 끝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박민규 작가의 신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여기까지 쓰는데 2시간 걸렸다.)

그리고 그녀가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순간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늘 시청하는 토요일의 쇼프로에서...즉 정해진 공식처럼 아이돌과, 발라드 가수가 출연하는 무대를 보고 있는데...카레를 먹으며 보고 있는데...방청객들의 박수소리도 여전한데...한결같은 MC에 늘 보던 무대인데...어떤 예고도 없었는데...느닷없이 요들송을 부르는 아저씨가 나와
요로레이리요 레이리요 레이요르리
하는 기분이었다.
(82p)



혹자는 이것은 판타지라고 이야기했다. 못생긴 여자와의 로맨스를 그린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판타지로 분류되는 세상이다. 속물이라고 욕하지만 80%이상의 사람들이 외모지상주의자라는 것에 한 표를 걸겠다. 내색하는 외모지상주의자와 내색하지 않는 외모지상주의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스타워즈의 광선검과 다를 바 없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못생긴 여자를 보고 요들송을 들었다는 남자의 심정을 이해하려면 '그래. 이건 소설이잖아'라는 암묵적 동의와 다짐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여자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판타지가 아니라고 믿고 싶은 사람이기에 5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가슴을 쿵하고 울릴만한 문장들을 턱턱 만나고 있었다.
일테면 이런 것이었다.

그녀에게 속삭인 요한의 말을 듣게 된 건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이해하는 순간, 그녀의 아니, 아니에요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선배는 그렇게 얘기했어요. 더없이 작은 목소리였지만 지극히 단호한 목소리였어요. 그땐 무척 놀랐어요.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본 듯한 말이었거든요. 뭐라고 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140p)


못생긴 여자이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뒤를 돌아볼 만큼 못생긴 여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신이 받게된 관심이 진심인지 아닌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일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또 어떤 게임의 벌칙은 아닌지, 자신이 농락에 속고 있는 것인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요한이 말했다. 그의 마음이 진짜라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이야'라는 문장을 만났을 때 방심하고 있다가 열려진 맨홀 뚜껑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항상 경계하고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관심을 받는 것이 어색한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친절한 말을 듣는 것이, 배려를 받는 것이 오히려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어떤 목적을 띠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무관심과 냉담함은 오히려 괜찮다. 그것은 익숙하다. 애써 신경쓰지 않으면 될 일이다. 문제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한 말들이다. 그래서 더 당황한다. 이런 것에 대한 대처법은 아직 습득하지 못했다.
여자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요한의 귓속말을 듣고 놀랐을 여자의 마음, 그럼, 정말로 믿어도 될까? 이것이 현실일까? 갖가지 물음들로 가득했을 여자의 머릿속이 그려졌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고통은 그것이었어요. 누구에게라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누구도 날 사랑해 주지 않을 거란 절망감...가난이나 그런 것은 이미 제게는 아무런 고통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생활이 더욱 궁핍해졌지만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고생을 하고, 조금씩 불편을 덜어가고...그래도 어쨌거나 기회란 것이 있는 고통이니까, 또 어쨌든 노력에 따라 소소한 회복이 가능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 '사랑'의 문제에 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274p)

 
20살에 체념을 먼저 배운 여자에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켄터키 치킨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며 맥주를 마셨다. 아주 오래 살아서 모르는 것이라고는 없는 영감같은 요한도 함께 있었다. 백화점에서 사람과 일에 치여 보냈던 하루를 셋은 닭다리와 맥주, 그리고 낯선 설레임으로 보상받았다. 남자와 여자는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것은 이어폰을 한짝씩 나눠끼고 같은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아무도 나의 나무에 오지 않아요.
나무가 아주 높거나 낮아야 했나봐요.
당신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그리 나쁘다고 생각지 않아요.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요? 난 딸기밭에 가는 중이에요.
실감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머뭇거릴 일도 없죠.
딸기밭이여, 영원하리

스무살의 그들은 조심스럽게 말을 놓고,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집을 향해 걷는다.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다. 그 연애에는 못생긴 여자와 남자의 연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남자와 여자의 연애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 연애가 그렇듯이 언제나 순탄할 수 만은 없다.

나는 우선 남자와 여자의 조심스러운 만남, 또한 거기에서 여자가 느꼈을 복잡한 마음에 대한 묘사도 좋았지만 요한이 켄터키 치킨을 앞에 두고 남자에게 했던 이야기들에서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호의냐 물으면 그것만은 아닌 거 같고, 동정이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란 거지. 뭐, 맞는 말이긴 해. 손잡이를 쥔 손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어.
처음엔 어떤 창이 자신을 파고든 건지 모호해.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것 역시 통째로 전달되기 마련이지. 특히나 여자는 더 그래. 왜 그런지 모르면서도...그래서 일단 전반적으로 좋거나 싫어지는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의 창을 더듬어보게 돼. 손잡이를 쥔 손은 여전히 그 무엇도 알 수가 없는거지. 알아? 적어도 세 개의 창 중에서 하나는 사랑이어야해.
(122p)



박민규 작가의 전작 '핑퐁'을 읽었을 때도 나는 이것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던 진리의 말씀을 발견한 것 마냥 호들갑을 떨었었다. 덕분에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은 포스트잇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요한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 작가의 말들은 도대체 이 사람은 도인이야? 라는 물음을 갖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의 마음과 또 한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세밀하고 정확하게 짚어내고 설명할 수 있느냐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여자의 마음에 공감하고, 그들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랐지만 결국 마지막 장을 덮고 나는 말할 수 없이 깊은 허전함을 느꼈다. 그것은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이건, 결국 판타지일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숨기고 방어하고 있지만 누군가가 60억의 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자신을 알아봐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존재감이 없다는 것, 멀쩡히 하루를 살고 있고, 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아무도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은 기분은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그저, 영원히, 평생에 한번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거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