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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O O K

아이오와, 이름마저 아련한 그 곳에서 보낸 시간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한강 (열림원,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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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팬이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친구는 여수의 사랑을 읽고 느꼈던 감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 책을 꼭 읽어보라고 했다. 도봉도서관에서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친구가 말했던만큼의 감동을 느낄 수 없음에 안타까워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그 때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강을 다시 읽게 된 것은 '그대의 차가운 손'부터였다. 그 소설을 시작으로 '채식주의자'까지 읽어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눈물나게 그녀가 부러웠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그녀를 딱 한번 실제로 본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야말로 식물같은, 나무같은 여자였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그녀곁에 흐르던 차분한 공기를 기억한다.
그녀의 소설을 사랑했기 떄문에 에세이 또한 궁금했다. 그런데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읽으려고 할 때 마다 절판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결국 대학교 도서관에 와서야 그렇게 읽고 싶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우울한 복학생같은 신입생인 나는 검은 점퍼를 입고 혼자 교정을 누볐다. 창가 도서관에 앉아 그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나는 이곳이 아이오와, 그녀가 삼개월간 있었던 곳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국땅이나 모국땅이나 외로움은 차별을 두지 않고 찾아왔다. 지금 나에게 지독히도 외로운 공간, 바로 오후의 학교 도서관이었다.

늦은 가을 어느 날, 이제는 이름을 잊은 한 여성 시인의 시 낭송회가 강당에서 열렸던 것을 기억한다. 빈 자리가 없어 출구로 나오고 있었는데, 복도 끝에 꼿꼿이 선 채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에란디스를 보았다. 그 거대한 여자의 얼굴에 어린 빛, 은은한 미소, 강단에 선 시인보다 더 강하게 전해져 오던 그녀의 존재감을 나는 기억한다.
그렇게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정신이 허공에서 에너지로 만나는 순간, 텍스트와 목소리, 감정과 표정이 한덩어리가 되는 순간을, 그 시절 그 숱한 낭송회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경험할 수 있었을까. 그 작은 도시에서 서툰 영어로, 연고도 전혀 없던 내가 그 생활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문화적으로 풍요한 공기-지금의 서울보다 숨쉬기 편안한- 때문이었다는 것을 결국 나는 부인하지 못하겠다. (122-123p)


바로 어제 나도 처음으로 소설 낭독이라는 것을 해봤다. 사실, 긴장감이 극에 달해 그대로 화장실로 뛰어가고 싶은 순간, 내 차례가 돌아왔다. 그런데 화면을 띄우고 음악이 흐르고, 인쇄되어 있는 내 소설을 읽는 순간 거짓말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소설을 읽는 동안, 3분여간의 시간동안 나는 소설 속에 있었다.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들은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이 아닌, 그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것만 같은 이들이었다. 낭독이란 것은 그 동안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산문집에서 읽었던 낭독의 시간이 더 고스란히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다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텍스트를 경험하고, 그 안에서 뿜어져나오는 감정의 덩어리를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

금요일, 어리둥절한 채로 보낸 한 주였다. 모든 것이 너무 급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30여분 남짓이었지만 산문집이 나에게 주었던 여유, 그 따뜻함을 꽤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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